십이월의 비치보이스



소주에서 맥주로 맥주에서 양주로 다시 폭탄주로 이어지는 강행군 -그해 겨울의 망년회에서, 스무명에 달하던 인원은 3차 4차를 거치며 아홉명 열명으로, 다시 네명 다섯명으로 줄어들어가고 7차까지 끝난 새벽 다섯시를 기해선 아무도 없이 멀뚱히 나혼자 거리에 남아있었다. 2005년 12월. 강남의 어느 이름모를 골목은 미친듯이 추웠으며 술취해 일행을 잃어버린 서울시 거주 26세 전모씨는 올라오는 취기와 비어버린 지갑으로 인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어깨를 잔뜩 움추린채 그 거리를 서성거려야 했다. 잡아두었다는 숙소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사방에 널려있는 모텔사이에서 대체 어디에 그 모텔이 있는지 찾을수 없었고, 근처를 몇바퀴나 뱅글뱅글 돌고 나서야 겨우 모텔을 찾은 후에는 대체 몇호실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갔는지 알수가 없었고 카운터 직원에게 사정사정 하여 대충 회사동료들로 보이는 일행이 들어갔다는방에 전화를 해보았으나 도대체 받는 사람이 없었다.

어쩐지 불쌍한듯이 쳐다보는 여직원을 뒤로한채 모텔에서 걸어나와 수어분간 고민을 하다, 머리를 벅벅 긁은후 모텔 야외 주차항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날은 정신이 나갈만큼 추웠고 바람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던 야외주차장엔 침대도 이불도 따뜻한 물한컵도 있을리 없었지만, 어쨌든 담배가 한갑이나 남아있었고 밤새들어도 다 못들을 개수의 노래가 들어있던 아이포드의 배터리도 빵빵했으니 어떻게든 아침까지는 버틸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렇게 – 가방을 베개삼아 드러눕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보다 나빴던 적이 있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지만, 그래도 담배마저 없는것보다야 다행스럽지 않니 중얼거리며 이어폰을 귀에꼽고 아이포드의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랜덤 재생한 아이포드에선 거짓말 마냥 비치보이스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고, 담배 몇대를 더 피워대며 나는 그들이 노래하는 바다를 그리고 여름을  – 그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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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t coast has the sunshine. And the girls all get so tanned.
I dig a french bikini on hawaii island. Dolls by a palm tree in the s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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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태양이 거짓말처럼 빛나고, 수영복을 입은 소녀들의 미소가 빛나고 시간의 흐름마저 이 백사장의 따스함 아래선 살짝 게을러져버릴것 같은 여름. 파라솔, 칵테일, 비치발리볼, 짭짜름한 바다냄새사이에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채 달콤하게 노래부르는 브라이언 윌슨의 미소,.같은 그런.

이상하지. 난 살아생전 단 한번도 그런 해변따윈 가본적이 없는걸. 그러니 그런 낭만적인 해변의 여름같은건 경험해본적도 없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다래봤자 대체로 쓰레기 더미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다 망해가는 시골 해수욕장이거나, 원자력발전소 너머 보이는 그저그런 뻔한 수평선 뿐이었음에도. 어째서나는 스물여섯살의 술취한 겨울 낯선 모텔 야외주차장에 누워서 알지도 못하고 가본적도 없는 비치보이스의 여름을 그리워 했던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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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ish they all could be california
I wish they all could be california
I wish they all could be california gir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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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속에서 남자는 말한다.
‘양키들은 우리의 무의식을 식민지화 했어’
수십년의 시간이 지나고, 수만리의 거리가 떨어진 2005년의 서울 어느 골목에서 조차,
여전히 이대사는 유효하다니.



과잉의 시대

James B. Lansing이, 그의 사업파트너였던 Ken Decke와 손을 잡고 LA에서 ‘Lansing Manufacturing’을 차리게 된것은 1929년의 일이었다. 1927년 ‘재즈싱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세상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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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Lansing Manufacturing’사는 극장용 음향 설비를 독점공급하던 ‘Western Elec

tric’사와 손잡고, 새로운 스피커를 공급하게 된다. 랜싱은 기존의 원형 보이스코일을 리본형으로 바꾸어 대역이 넓고 능률이 뛰어난 스피커를 개발하게 되었고, 이는 기존의 스피커들을 모두 대체할만큼 큰 성골을 거두게 되었다. 1934년 랜싱은 15인치 우퍼를 커다란 베이스 리플렉스 통에 집어넣고 혼 트위터를 장착한 최초의 2WAY 시스템을 발표한다. 그즈음, 일련의 뮤지컬 영화들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던 MGM은 랜싱의 스피커를 자사의 표준시스템으로 채용하게된다.

미국은 대공황의 지옥속에서 길을 잃은채 헤매고 있었지만, 극장은 관객들로 미어터졌으며 그 공간의 한편에선 랜싱의 스피커들이 과잉된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풍성한 저역 과장된 소리, 세상은 결핍의 대기로 물들어있었어도 랜싱의 스피커들은 나날이 풍요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서 행복한 과잉으로 채색된 미래를 꿈꾸었을까. 대책없는 낙천주의, 아름다운 화면 더할나위없이 현실성 없었던 MGM의 뮤지컬 영화속에서 지나간 그 하루하루를 희망이라고 불러야할까 도피라고 불러야 할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던 1938년, 랜싱은 동업자였던 켄데커가 비행연습중 사고로 사망하는 불행을 겪게된다.  순수한 엔지니어였던 랜싱을 대신해 거의 모든 경영을 도맡아하던 데커의 죽음은 곧 재정상태의 악화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랜싱은 Western Electric사에서 퇴직한 엔지니어들이 세운 Altec사에 회사를 매각하게 된다. 자사의 스피커들에 랜싱의 공법을 사용하길 원했던 알텍사에 랜싱은 자신의 이름을 같이 넣어줄것을 요구했고, 지금도 남아있는 Altec Lansing corp 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유럽은 전쟁의 불안감으로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알텍랜싱의 기술담당 부사장으로 임명된 랜싱은 이에 개의치 않고 스피커 설계에 온 정성을 기울였고, 1943년 동축형 스피커 시스템인 NO. 604와 2WAY A-4를 발표한다. 이 A-4 시스템은 최초로 뒷명을 밀봉시킨채 제작한 저음용 인클로저가 사용되었다. 단순히 유닛이 아닌 인클로저에서 울리는 소리를 이용하여 그 이전까진 상상도 할수 없었던 저역대를 이 스피커는 얻어낼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잠수함의 자성탐사기에 사용되던 알니코V영구자석을 스피커에 이용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영구자석을 스피커에 적용한것은 랜싱이 최초였었다.

유럽의 어느 길위에서, 아시아의 어느 길위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채 서로를 죽이고 다시 죽어갔어도, 그에게는 오로지 스피커 뿐이었다. 설계가 시작되면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며, 그렇게 그가 설계한 스피커들이 하나씩 세상에 나오면서 계약했던 5년이 지나가 버린다.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과 함께 2차대전이 끝나고, 이듬해 계약기간을 끝낸 랜싱은  알텍에서 나와 James B. Lansing Sound Incoprated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리게된다. 그리고 이회사가, 지금의 JBL의 전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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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 Lansing 은 1902년 미국 일리노이즈주에 있는 작은 마을 고핀에서 태어났다. 탄광기사였던 아버지 밑으론 13명의 형제가 있었고 그중에서 그는 아홉째였다. 본명은Jaems Martinini. 어린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고, 아마츄어 무선사라던가 축음기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며 자라갔다. 고등학교 졸업후 자동차 수리공으로 사회의 첫발을 디딘 그는 아마츄어 무선사를 했던 경험을 살려 솔트레이크에서 라디오 송신기사 노릇을 하게된다. 이 도시에서 그는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났고, 후에 그의 중요한 동료가 되는 Ken Decker를 만나게된다. 1929년 그들은 LA에 ‘Lansing-Manufacturing’ 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고 회사를 설립한다.

그는 – 소비가 미덕이던 과잉생산의 황금기에 사업을 시작해 대공황의 악몽속에서 도무지 현실성없는 스피커들을 만들어 나갔다. 위조된 꿈을 그려내던 시어터, 그 드넓은 공간을 울리기 위해 그의 스피커들은 언제나 거대하고 또 요란해야 했다. 과잉이라고 할만큼의 박력이 있어야 했다. 과장된 저역, 과장된 소리. 지금의 JBL의 장단점들은 어쩌면 그 시절부터 그들의 이마에 아로새겨진 일종의 주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더크게 더욱세게, 동시에 너무도 투명하게, 아름답게. 세상은 더럽고 황폐하지만, 이곳에는 꿈이있는걸 희망이 있는걸. 절망의 나락속에서 사람들은

알콜병을 껴안은채 죽어갔어도, 감기는 그들의 귓가에서 마저 그 아름다운 소리들이 메아리치도록.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회사를 세운 랜싱은 다시 의욕적으로 스피커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매니아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유닛 D-130풀레인지 스피커와 175드라이버. 직경4인치의 보이스코일과 알루미늄재질의 센터돔, 만곡형 콘지, 자속밀도가12000 가우스가 되는 강력한 알니코 V자석 채용. 그당시로서는 신기에 가까운 스피커였지만 경영수완이 없던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결국 1947년 주식 40%를 양도하는 조건하에 ‘Marguardt’항공사로 부터 경영자금을 이끌어 쓰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이때 당시 ‘Marguardt’의 경리부장이었던 Willian H. Thomas를 만나게 된다. 그는 곧 회사의 중역으로 영입되게되고, 후에 JBL을 이끌어가게된다. 1947년 캘리포니아주의 베니스에 있던’Marguardt’항공사의 공장내로 공장을 이전하게 된 그의 회사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또다시 대단히 큰 적자를 보게 된다. 결국은 ‘Marguardt’의 합병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Marguardt’역시 곧 당시 유수기업이었던 ‘General Tire’사에 넘어가고 이와중에 토마스 역시 항공사에서 나와 JBL의 재건을 위해 랜신을 돕게된다. 1949년 회사를 다시 LA의 후렛쳐 드라이브로 옮기고 회사를 회생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던중 당시 미국의 재력가였던 ‘Robert Anold’의 지원을 받게된다. 그의 도움 으로 알니코V영구자석을 2년간 무상으로 공급받게된 랜싱은 계속해서 연구에 몰두하게 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영부진은 계속되어만 간다. 부채는 2만달러 까지 늘 어나고, 랜싱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된다.

1949년 9월 29일.

James B. Lansing은 공장을 한번 둘러본후 아끼던 느티나무에 목을매어 자살을한다.  그의나이 47세의 일이었다.

그를 동업자 이전에 숭배자로 여기던 홀름의 경영아래 랜싱의 생명보험금이었던 1만달러 기반으로 전직원이 합동하여 회사를 살리기 위해 나서게 된다. 1955년 JBL의 ‘Hartfields’는 발표후 격찬을 받으며 ‘Life’지의 표지로 등장한다.스테레오 시대가 도래하고 미국은 전쟁직후 역사상 유래없던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1957년 ‘Paragon’을 발표하고 JBL은 전세계 오디오 매니아들의 격찬을 받으며 다시한번 정점에 오르게 된다. 고도자본주의시대. 휘발유로 잔디를 키우고 집집마다 커다란 자동차를 과시하며 주말마다 아이들을 파티에 보내는. 집집마다 TV 가 들어오고 모든 산업이 최대호황을 누리며 소비가 미덕이고 낭비가 미덕인 고도 자본주의시대. 그 황금기가 도래하게 된다. 랜싱의 스피커가 보여주던 바로 그시대가 도래한것이다. JBL은 스튜디오 시리즈를 전세계에 흩뿌리고, JBL은 집집마다 침투하여 더이상 극장에서 숭배되는 되는 스피커가 아닌, 수많은 거실한켠에서 소비되는 대량 생산품이 되어간다.


현재 JBL은 세계적인 오디오 기업 하만인터내셔널의 산하에 있다. 이젠 스테이지를 울리는 PA와 카오디오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만 사는 자사의 염가제품 에도 JBL의 브랜드를 붙이는 일이 잦아서, JLB의 라인업엔 정체모를 스피커들이잔뜩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통적인 덴마크 생산이 아닌, 대만이나 일본 생산품 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AV쪽에선 여전히 많은 평을 받고 있지만, 하이엔드라는 차원에선 한발 밀려난 모습이 역력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과잉의 시대를 살고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디선가는 대공황때처럼 내지는 2차대전때처럼 누군가가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총에 맞아 죽 겠지만 JBL의 소리가 울리는 공간 내에서 그런것들은 왠지 먼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질듯 생각이 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연구실에 틀어박혀 스피커설계만 했던, 그리고 자살해버린 랜싱의 생애처럼.

문을열고 나가지 않는 이상 문안에 세상에선 여전히 눈앞에 과잉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타이트한 락비트가 분노가 아닌 취향이 되는 시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땅에서 고도자본주의사회를 살고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있다.

그리고 문밖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죽어간다. 그런법이다.


좋은하루 되시길.

식섭송 혹은 뉴웨이브

” Men At Work는 뉴웨이브의 뉴웨이브였다. ”

                                        -Brian Eno


여느때처럼 웹을 뒤지다 얼핏, ‘식섭송’이라는 제목의 ‘엽기송’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다.  뭘까 하는 호기심에 검색을 해보았다니, 이 생각만큼 광대하지 않은 네트에서 꽤 히트를  했었는지 여기저기에 ‘식섭송을 들어보고 싶어요’ 내지는 ‘ 엽기 : 식섭송’따위의 게시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수 있었다. 나 역시 대체 무슨노래인지 궁금함에 깨어진 링크 몇개를 지난후에 아직 살아있는 스트리밍 하나를 발견했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후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Men At Work의 Down Under .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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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뉴웨이브는 분명 뉴로맨틱스와는 다른 단어였다. 그것은 신스팝과도 달랐으며, 펍록 혹은 컬리지록과도 동의어가 될수 없었다. 아직오지 않은 시대의 모던록도, 파워팝도 서서히 고개를흔들며 물결을 흔들던 쟁글팝과도 같은 단어는 아니었다. 혹자는 펑크의 다른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마치 마이블러디 발렌타인을 록밴드라고 부르는것과도 같은 오류이다. 어떤의미에서 마이블러디 발렌타인은 락밴드였을지도 모르지만, 대체 락이라고 부를만한 성질의 어떤것들이 그들의 창백한 기타노이즈 속에 남아있었던가? 이는 뉴웨이브에도 똑같이 통용된다. 슬리츠와 B-52는 대체 어떤 공통점으로 묶을수 있을까. 그들가운데 어떤 공통점으로 우리는 그들을 뉴웨이브라고 부를수 있었던걸까. 그럼에도, 그어떤 단어도 뉴웨이브와 동일어가 되지 못했음에도 뉴웨이브는 그 모든걸 포괄해버린다. 듀란듀란과 디페쉬모드가 뉴웨이브였듯 블론디와 토킹헤즈도 뉴웨이브였다. 텔레비전과 모텔즈가 뉴웨이브였다면 엘비스 코스텔로와 블래스터즈역시 뉴웨이브여야 한다. 모든것은 새로워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새로움과 우리들 감성사이에 놓여진 아득한 간극. 당신과 나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 그 다름만이 유일한 가치라는 신앙. 부수어지는 형식과 만들어지는 형식들. 물결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모두 발맞추기 버겨워 보이는 무책임 한 미래지향에 대한 찬양. 찬송. 펑크,노이즈락, 스래쉬팝,고딕,모드, 그리고 서서히 그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유아기의 일렉트로니카. 수도없이 많은 서브장르들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장바닥같은 80년대 뉴웨이브 신에서 오로지 이것만이 진리였다. 진실이었다. 듀란듀란과  REM을 묶을수 있는 하나뿐인 ‘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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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1년엔.

여전히 토킹헤즈는 펑크밴드였으며, 그린 가트사이드(Ex.스크리티 폴리티) 는 런던에서 마르크스를 읽고 있었다. 런던에서, 혹은 뉴욕에서 맨체스터에서의 저마다의 움직임들은 저마다의 광채들은 그들을 무언가로 묶을수 있는 구심점을 찾아볼수 없었다. 아직 그것은 서로의 각기 다른 ‘소리’들이었을뿐, 한시대를 관통했던 물결은 아니었다. 잘차려입은 스팬도우 발레와, 어떤의미에선 비범(개인적으론 그다지 비범한것 같진 않아보이지만) 해보이기도 했었던 울트라복스만이 자신들을 ‘뉴웨이브’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Men At Work는 데뷔앨범 Business as Usual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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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ing in a fried’out combie

n a hippie trail’ head full of zombie

I met a strange lady’ she made me nervous

She took me in and gave me breakfast

And she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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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도 런던도 맨체스터도 리버풀도 (심지어 하와이도 아닌) 생경스러운 Land Down Under-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날아온 이 촌스런 사내들은 이 앨범에서 너무도 많은것들을 정의내려 버렸다. 듣도보도 못했던 어이없는 브레이크 비트와 기묘한 영어발음. 비꼬는듯한 기타리프에 실린

무덤덤한 자기인식. 거지같은 스테이지 매너와, 눈꼽만큼도 패셔너블하지 못했던 스타일. 그들은- 블론디처럼 세련되지도, 스팬도우 발레처럼 잘차려입지도, 프랭키고즈투 헐리웃처럼 섹시하지도 않았다. 조이디비전처럼 어둡지도, 팝그룹처럼 급진적이지도, 엘비스 코스텔로처럼 냉소적이지도 않았다. 그 어떤 밴드와도 닮지도, 그 어떤 신에 영향을 받은듯 보이지도 않았다. 방진실의 플라스크 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일련의 재미없는 ‘실험’앨범들중에서도 도무지 그런 식의 접근이란 본적이 없었다. 그 어떤 클럽에서도 그런 사운드는 들려준적이 없었다. 그것은 대륙아래 버려진 땅에서 밀려온 정체모를 ‘그어떤’것 혹은 ‘놀라움’이었다. 누구도 그런식의 사운드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80년대에 밀려든 어떤 종류의 ‘물결’이었으며, 그 단어 자체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던 ‘뉴웨이브’에 대한 진정한 ‘의미’였다. 미지. 혹은 두려움. 낯설만큼 새로운것들에 대한 무감각한 찬양. 데뷔앨범 한장을 발표했을 뿐인 이 이방인들은, 서로 다른곳에서 서로 다른 사운드에 열중하던 일련의 움직임을 거대한 물결로 모았다. 뉴웨이브. 80년대는 1980년이 아닌  바로 1981년에 그런식으로 시작하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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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많은것들이 바뀌었다. 그린 가트 사이드는 마르크스를 던저버렸고, 스크리티 폴리티는 일렉트로니카의 옷을 걸쳐입은채 뉴웨이브란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토킹헤즈는 더이상 펑크밴드일수가 없었고, 닐 테넌트는 잡지사에 사표를 내버렸다.. 빈스클락은 디페쉬 모드를 때려치웠고, 마틴고어는 이후 이십여년 가까이 지속될 자신들의 진화의 움직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폴리스는 싱크로시티를 위한 긴 동면기에 들어갔으며, REM은 조지아에서 그들의 첫번째 싱글앨범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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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ome from a land down under

Where beer does flow and men chunder

Can’t you hear’ can’t you hear the thunder

You better run’ you better take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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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 발표한 그들의 두번째 앨범은 신통치 못한 평가만이 돌아왔다. 슬럼프였는지 혹은 2년전 그들처럼 그렇게 빛날순 없었던건지는 모르겠으나, 싱글 커팅된 It’s Mistake만이 소폭히트했을뿐, 다른 여느 원히트 원더처럼 서서히 기억속에서 그들은 사라져갔다. 같은해, 토킹헤즈는 브라이언 이노의 프로듀싱 아래 그들의 최고걸작 Remain In Light를 발표한다. 댄셔너블한 비트와 자극적인 가성으로 중무장한 스크리티 폴리티가 큐피드앤 프시케로 돌아온건 다시 그로부터 이년이 지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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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4년. 다시 들어본 그들의 데뷔앨범은 생각만큼, 혹은 기대만큼 ‘새롭게’들리진 않았다. 이십여년. 수많은 스타일과 수많은 사운드들이 각기 ‘새로움’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새긴채 세상 에 등장하고 사라져 버린 지금, 그들의 기괴한 기타리프는 촌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기묘한 흥분 을 자아냈던 그들의 이상한 발음은 이젠 단순한 폭소를 자아내기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십삼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그들의 그 옜날음악을 도무지 귓가에서 떼낼수가 없는 이유는,  어쩌면 나라는 인간이 정말로 매혹되었던건 뉴웨이브의 그 잘 만들어진 사운드가 아니라, 약간은 서글플만큼이나 집요했던 새로움에 대한 그들의 무목적스러운 동경이기었기 때문인건지..

아울러, 단순히 의 명곡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자신들의 땅에 대한 경멸섞인 속어인 Down Under를 제목으로 썼던, 그들이 이 자조적이고 (약간은) 슬픈음악에 대해, 단순히 발음을 가지고 놀리고 깔깔대며 폭소를 터뜨리는것 이외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저열함에, 난 여전히 화가 치밀며, 앞으로도 줄곧, 화가 치미리라. 하긴, 나하나쯤 분노한다고 뭔가가 달라질리는 없을테지만. 적어도, 취향 혹은 사상같은 걸 떠나 살아나가며 지켜나가야 할 하나의 태도로서 – 난 줄곧 분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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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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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뻥이야. 

한걸음 내딛는 일에 관하여


(사진은 무단전재 -_-; 출처는 www.hpc.ru 항의들어오면 삭제할께요 ㅠㅠ)



본인은 뉴튼 이니 사이언이니 200LX니 하는 기기들은 써본적도 만져본적도 심지어 실물로 본적도 없습니다

.. 매니야 여러분 죄송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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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엔 한두 명 씩은 꼭 볼 수 있다.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 책도 아니고 핸드폰도 아닌 넓적하게 생긴 기계를 꺼내곤 그 위를 펜으로 슥슥 문지르며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곧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적는 걸 멈추더니 액정을 한참 쳐다볼지도 모른다. 혼자서 멋쩍게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고, 문득 커다란 감동이라도 먹은 듯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지도 모른다. 혹은 대단히 호전적인 표정으로 그 기계의 등판을 펜으로 콕콕 찔러대거나, 갑자기 그 기계를 귓가에 대더니 전화통화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피디에이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대체 어떤 마술상자 이길래 그 기계 하나로 저토록 다채로운 표정이 나올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런 진지한 고민에 너무 깊게 빠져버린 덕에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버리고 뒤늦게 허겁지겁 역 이름을 확인하곤 애꿎은 아까 그 사람을 탓하며 투덜거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흠.

퍼스널 데이터 어시스턴트(Personal Data Assistant 이하 PDA) 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어서 아까 그사람이 만지며 재밌어 하던 그 기종의 꼬리를 잡고 하나하나 바로 전기종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달력은 1984년을 가리키고 있게 된다. 영국 사이언(PSION)사가 1984년에 발표한 사이언 오거나이저(Psion Organizer)는 데이터 베이스 기능을 내장하여 핌즈(PIMS -개인일정관리)를 수행할수 있었으며, RS232C케이블을 이용한 PC와의 통신이 가능하던 기계였다. 물론, 생겨먹은 모양은 전자수첩에 가까웠지만. 하지만 PC와의 연동이 가능한가 라는점은 얼핏보면 그 목적의 차이가 구분되지 않는 전자수첩 과 PDA를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즉 제조되어 완성되는 순간 모든 기능이 고정되어 버려 그 이후에 첨가되는건 데이터 뿐인 전자수첩과 달리,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기능을 확장할 수 있고 작업한 데이터를 다른 단말 로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은 무엇보다도 피시와의 통신이 가능해지면서 생기는 장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디에이란 용어 는 그보다 훨씬 이후, 그러니까 1990년대에 들어서야 처음 사용되었고 그렇기에 PDA 의 시발점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할 일없는 매니아들의 재담속에서 분분히 토론되는 내용이다. 물론 그 시발점이 사이언이든 뉴튼이 되었든, 팜 파일럿(Palm Pilot) 이 되었든간에 그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이란 십원짜리 동전하나도 없지만 -매니아들 에겐 언제나 그런 것 들이 자존심이요 삶의 자잘한 재미가 되는 법이니까.

물론 필자는 그 문제의 라는 물건을 만져본적도, 실물로 본적도 없다. 그냥 인터넷을 뒤지다, PDA의 역사를 소개하는 거룩한 글 한귀퉁이에서 그 고명하신 이름을 보고 음 그렇군 하며 고개를 잠시 끄덕였을뿐이다. 별다른 감흥도, 감동도 없었다. 생겨먹은건 잘봐줘야 전자수첩이요, 얼핏보면 전자계산기라고 해도 믿을만한 수준이다. 한줄짜리 액정에, 계산기처럼 다닥다닥붙은 버튼에. 무뚝뚝한 검은색까지. 쿨하거나, 정감가는 기계는 실물로 본다고 하더라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지금 옆자리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이게 세계최초의 PDA입니다. 라고 말해도 누구도 감동먹거나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끽해봐야 ‘뭐야 계산기잖아?’라는 대답이나 돌아겠지.

어쨌든 1984년 이후에는 1985년이 오고 그다음엔 86년이 오고, 그런식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세상은 변해가고, 과학은 발전하며 개발자들은 놀고 먹어선 월급을 받을수 없는 법이다. 그이후의 세상엔 랩탑, 즉 노트북 컴퓨터란게 등장할테고,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 랩탑을 한손에 들고 사용할수 있을만큼 작게 만든 제품도 나오게된다. 지금도 수많은 열혈매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HP의 95LX와 200LX가 바로 대표적인 물건이다. 축소판 랩탑처럼 생긴 이넘들은, 운영체제로 MS-DOS 를 사용하고 로터스(Lotus) 를 위시한 이런저런 사무용 애플리케이션을 내장한 엽기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비표준 해상도로 인해 가장 큰 장점이었던 MS-DOS와의 호환성이 떨어졌던 95 LX의 단점을 뜯어고친 200LX는, 지금도 사용하는 사람이 많으며 중고거래가 될정도로 뛰어난 제품이었다. 키보득 조금더 컸거나 중고값이 조금더 낮았다면 지금 필자의 가방에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어쨌든. 이 모델들은 현재 PDA의 한갈래를 차지한 형태인 핸드헬드 피스(Handheld PC 이하 HPC) 의 원형이 되는셈이다.

그리고 1993년 애플사는 뉴튼 메시지 패드(Newton MessagePad, 이하 뉴튼) 라는 제품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 기계를 소개하면서 붙인 단어가 바로 PDA였다.

재밌는 일이지만, 이 바닥에선 대체로 한걸음을 내딛는 것 보단 반걸음을 내딛는 것이 언제나 유리해 보인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도 대부분의 IT역사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혁신적이었던 친구들은 언제나 혁신적으로 망해버렸다. 제록스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퍼스널 컴퓨터 의 개념을 만들었음에도 여전히 복사기나 팔고 있고, 그 제록스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지금의 GUI환경이란 걸 처음으로 제대로 현실적으로 구현해냈던 리사역시 화끈하게 망해버렸다. IBM의 32bit 운영체제 OS/2는 그 막강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장난감이었던 윈도우 3.1에게 밀리는 수모를 당하게 되며, 그 윈도우 3.1이 그럭저럭 쓸만하게 된 윈도우 95로 변신할때쯤 엔 이미 시장에서 퇴출당해 매니아들 사이에서나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만두 하군 이라고 생각하곤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게된다. 제록스의 ‘파크’(PARC)연구소에서 만들어낸 알토(alto)는 혁신적이었지만 경영진들 역시 혁신적으로 멍청했으며, 무엇보다 그 머신 역시 혁신적으로 느렸다. 그리고 혁신적으로 비쌌다.(여담이지만 ‘파크’에서 만든 유명한 기술중의 하나로 이더넷(Ethernet) 도 있다. 이더넷이 뭔지 모르는 분들께는, 동네 PC방에서 그 수십대의 컴퓨터를 연결한 기술이 이더넷이라고만 설명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기술로 제록스가 챙긴 몫은 없는걸로 알고 있다. 멍청한 경영진은 멍청한 개발자보다 더욱 용서가 되지 않는법이다.) 잡스가 자기 딸이름을 프로젝트 프로젝트 명으로 붙였을만큼 애착을 가졌던 리사 프로젝트는 회사 내부 사정의 휘말리다가 잡스로부터 미움을 받는 프로젝트로 돌변하고는, 정말 우습게도 자사의 또다른 프로젝트였던 매킨토시에 밀려 시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그 리사를 밀어냈던 매킨토시는? 클론 PC를 허용하지 않은 독단에 스스로 뛰어든후 IBM의 저열한 사무용 계산기였던 The PC에 처참하게 밟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시도해왔던 GUI와 누구나 쉽게 쓸수 있는 쉬운 컴퓨팅 환경이란걸 영리하게 홈쳐가서 자신들의 장난감에 덧붙인 마이크로소프트는 또다른 공룡이 되어 전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그 애플의 두 번째 불운이, 바로 뉴튼 메시지 패드였다.

길이 184.75mm, 폭 114.3mm, 두께 19.05mm, 무게 400g. 최초의 오리지널 메시지 패드는, 20Mhz의 클럭을 가진 ARM 610 CPU를 채용하고, 4MB의 롬과 640KB의 램을 탑재하고 있다. PCMCIA type 2슬롯 하나를 채용하고, 컴퓨터와의 연결을 위한 RS422 시리얼 포트를 지니고 있다. 336 X 240의 해상도를 지닌 저 전력 저 반사 액정을 채용하고 9600보드 의 속도를 내는 IR(적외선 통신)포트를 지니고 있었다. 다음해에 OS가 1.3으로 업그레이드된 Message Pad 100모델이 나오고, 97년 메시지 패드(MessagePad) 2100을 마지막으로 뉴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마지막 모델이었던 2100은 161.9mhz의 ARM 110 risc CPU를 채용했고, 8mb의 Mask Rom 과 5mb의 Ram을 탑재하고 있다. 액정은 480 X 320의 해상도의 16 Level Grey 액정으로 변화하고, 두 개의 PCMCIA스롯을 탑재하게 된다.

크기가 생각보다 크긴하지만(거의 현재의 태블릿 PC에도 밀리지 않을만한 크기이다), 뉴튼은 지금 우리가 PDA라고 부르고 있는 물건들의 개념을 정의내린 기계였다. 하긴 PDA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기도 했으니까. 뉴튼은 애플사에서 줄곧 고수하던 GUI를 PDA에 이식했을뿐 아니라, 필기인식을 채용했다는 점에서 일대 혁신을 이루어낸 셈이다. 기존의 사이언이나 200LX 들이 버튼입력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뉴튼은 가장 인간적인 방식 즉 원하는대로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명령을 내린다는 관점으로 PDA에 접근을 했던 것이다. 구 소련의 파라그래프(ParaGraph)를 라이센싱 한 필기인식 기술을 탑재하고, 필기 입력으로 받아들여진 문자나 도형들, 그리고 그들의 조합을 명령어로 입력하는 제스처방식을 채용했다. 사용자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풀다운 메뉴나 버튼을 찾아누르는 것 이외에도, 그냥 화면성에 문자를 쓰고 도형을 그리는 방식으로 기계를 조작할수 있게 된 것이다. 필기입력 이란걸 단순한 데이터의 입력이 아닌, 기계전체의 조작에까지 확대한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뉴튼 인델리전스 오에스(Newton Intelligence OS)는 직관적이다 못해 감성적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아울러 뉴튼은 이런방식으로 입력장치와 출력장치를 분리가 아닌 결합을 시킨다. 입력장치에 입력을 하면 출력 장치에 결과가 출력이 되는 것이 아닌, 마치 종이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듯, 출력 액정화면 어디에든 글자를 쓰고 도형을 그리면 그 필적이 입력되어 사용자가 글자를 쓰는 바로 그 자리에 출력이 된다. 그렇게 입력한 글자를 펜으로 죽 긁어 내리거나 특정 도형을 그리는 등의 제스처를 통해 편집을 하거나 정리를 할수 있다.

또한 뉴튼은 패키지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팩키지는 뉴튼에서 구동되는 일련의 어플리케이션을 부르는 말인데, 뉴튼을 매킨토시에 연결하고 이 패키지들을 뉴튼에 설치함으로서 뉴튼은 뛰어난 확장성뿐만 아니라 기타 기기의 도움없이 스스로 하나의 플랫폼으로 동작할수 있는 스탠드 얼론 을 구현해 냈다. 아울러 팩스송신기능이나 IR 방식의 무선통신을 이용한통신, 모뎀을 이용한 메일서비스와 자체 외부프린터 연결기능등등 역시 이런 뉴튼의 성향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매니아들이 말하는 뉴튼의 매력은 엄청난것이었다. 아니 그 매니아들 역시, 대부분의 경우 우연히 뉴튼을 한번 만져본후 뉴튼과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발표가 되었던 시점부터 뉴튼은 엄청난 기대를 모았으며, 숱한 찬사를 받았다. 그들에게도 그리고 당시 앳된 까까머리의 중학생이었던 필자에게도 뉴튼은 꿈의 머신이었고,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꿈이 머신이다. 사이언의 심비안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PDA용 운영체제로 손꼽히는 Newton OS 라던가, 심플하면서 고급스러운 디자인, 10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탄복스러울 만큼 뛰어난 성능, 다채로운 확장성과 PDA역사 최강이라는 감성적 인터페이스. 완성도라는 면에서 뉴튼은 PDA의 어찌보면 짧지 않은 역사에서 단연 두드러질만큼 ‘완벽한’기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시점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물게된다. 왜냐고? 뉴튼역시 처참하게 망했기 때문이다.

미완이란 주제를 받아들고, 컴퓨터와 이쪽 IT바닥에 대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후 마감을 이주일이나 간크게 넘겨버린 지금까지 지난 시간동안 나를 계속 괴롭혔던 사실은 – 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슬프게도 이바닥에선 도무지 아무리 뒤져보아도 ‘완성’이라는 개념이 조재하질 않는다. 모든건 사후지원과 지리한 교정작업이 필요한 미완의 제품들뿐이다. 만약 어떤 제품이 더 이상 발전할 필요가 없게되는 시점이라곤, 그 제품이 시장에서 쓸모없음 판정을 받고 시장에서 아웃 판정을 받았을 때 뿐이다. 그리고 그런건 –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집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땐, 모든 층을 쌓아올리고 지붕까지 덮었을때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층을 쌓다가 갑자기 경영진이 쳐들어와서는 담배한대를 꺼내물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봐 친구. 우리들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말이지 도무지 이제품은 장사가 안될 것 같아. 그만하도록 하지’라고 말하는 통에, 하던 공사를 멈추고 주섬주섬 연장을 챙겨 나와버리는걸 우리는 완성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일이 없는 한엔 언제나 공사중이다. 한층을 쌓으면 다음 층을 쌓고, 또 한쪽에선 그 사이에 그 윗층을 쌓을 궁리를 한다. 지붕을 씌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마치 해발 몇미처 고도까지, 라는 목적을 세우지 않은채 무작정 하늘에 닿아보자고 쌓아올라가는 바벨탑과 같다. 도무지가 완성이란게 없다. 모든건 미완이고, 지금 이순간에도 개발자들은 쉴새없이 탑을 쌓아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것이 미완이기에 나는 더욱 헤맬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것이 그 많은 미완들 사이에서도 특출난 미완인지. 세상엔 김서방이 수만명도 넘는데, 대체 그중 어떤 김서방을 데리고와서 박서방과 합방을 시켜야 하는지, 나로서는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기계적인 면에서, 완성도란 면에서 뉴튼은 ‘완성’된 기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한쪽 날개만을 지나치게 크게 불린탓에 다른 한쪽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혁신적인 설계와 제작에 뒤따르는 혁신적인 가격. 뉴튼이 망했던 가장큰 이유중 하나는 바로 지나친 고가격이었다. 뉴튼은 분명 그 기계 자체로서도 꿈의 머신이었지만, 카달로그의 가격표를 확인하면 더더욱 꿈의 기계가 되어버렸다. 1994년 메시지 패드 110의 가격은 600$에 달하였다. 1996년에 발표된 130의 경우엔 그가격이 800$를 호가했고, 97년에 나온 마지막 모델이었던 2100의 경우엔 999$까지 올라갔다. 1993년 애플이 뉴튼 메시지 패드 100을 보스턴의 맥월드 엑스포에서 발표한후 처음 십주동안 50,000여대가 팔려나갔지만 그 이후로 뉴튼의 수명이 다할때까지 의 판매량은 고작 80,000대가 고작이었다.  초창기 100,110,130등의 모델이 자잘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던 반명, 그 단점들을 개량하고 그 기계적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던 2000,2100등의 모델은 그 가격까지 극한으로 끌어올려버린것이다 아울러 뉴튼이 발목을 잡았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서브형 노트북에 필적하는 ‘크기’였다. 개발진은 자연스럽게 사람이 들고 필기할 때 부담되지 않으면서 안정감을 가지게 할수 있는 무게를 600g정도로 보고 그에 맞추어 설계를 했었지만, 그 장점은 뉴튼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는 느낄수 없는 장점이었던것이었다. 그리고, 뉴튼을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의 입장에서 뉴튼은 좋긴하지만, 가격과 크게 무게 모두가 부담되는, 그런 제품이었던 셈이다. 뉴튼은 크기를 키움으로서, 넓은 화면과 높은 해상도 등의 장점을 얻었지만, 그것은 휴대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매킨토시 이외의 IBM PC와의 호환성이 좋지 않았던점도 큰 걸림돌이었다. 뉴튼은, 애플사가 만들었기에 만들 수 있었던 ‘새로운’ 기계였지만, 그 애플사가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점역시 고스란히 품고 있었던 셈이다.

어떠면에서 그들은, 뉴튼이란 기계를 그들이 생각했던 컨셉에 거의 근접할만큼 뛰어나게 ‘완성’시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뉴튼은 꿈의 머신이거나 혁신적인 신기술이기 이전에, 커다란 판돈이 걸린 사업 이었고 장사였다. 컴퓨터 매니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동경의 대상이기 이전에, 소비자가 흥미를 느끼고 구입할수 있도록 해야하는 ‘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프라이드와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그 누구보다도 멀리, 혁신적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이 나아간 거리만큼이나 커다란 거리를 – 그들의 제품을 사야할 소비자 사이에도 만들어 버린 것이다.

PDA를 정의 내린 뉴튼 메시지 패드는 그렇게 완성되었고, 동시에 진정으로 완성되진 못한 미완의 머신으로 남아버렸다.

실질적인 PDA 시장의 물고를 열었던건, 팜 파일럿(Palm Pilot)이었다. 제프 호킨스(Jeff Hawkins), 도나 듀빈스키(Donna Dubinsky) 등은  팜 컴퓨팅(Palm Computing)을 차리고 그들이 만든 그래피티를 채용한 PDA인 파일럿을 만들게 된다. 1996년의 일이다. 파일럿은 실제 필체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높은 처리능력이 요구되었던 뉴튼과는 달리 알파벳을 비슷한 형태의 도형으로 간략화시킨 그래피티 방식을 채용함으로서 뉴튼에 비해 적은 처리능력으로 필기입력을 받을수 있었다. 또한 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손바닥에 들어올만한 작은 사이즈로 본체를 디자인함으로서 휴대성을 높였다. PC와는 동기가 되었으나, 각각 서로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시켜서 데이터를 교환하던 뉴튼과는 달리, 이런 동기화 작업을 핫싱크라는 기능으로 간편하게 통합하고, 크래들에 올려둔채 버튼을 누르는정도로 간편하게 핫싱크를 할수있도록 만들었다. 파일럿은 저해상도에 그다지 빠르지 않은 CPU와 적은 램 등등, 뉴튼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은 하드웨어 스펙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얻은 소형화와 저가격이란 무기로 18개월만에 100만대를 팔아치우며 PDA시장을 독점하다싶이 하게된다. 1999년 기준으로 팜은 미국 PDA시장의 73%를, 세계 시장의 68%이상을 차지했으며, 윈도우즈 CE기종이나 팜의 OS를 라이선싱해서 만든 소니의 클리에나 기타 호환기종들에게 많은 시장을 빼앗긴 지금도 미국내 50%이상의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해가고, 과학은 발전한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경영진들은 머저리에 가깝고, 개발자들은 놀고먹어선 월급을 받을수 없는 법이다. 지금도 이바닥에선 여전히 지붕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채 저마다 탑쌓기에 열중하며 도무지 목적도 한계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탑을 쌓아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누구나 고민하며 다시 고민한다. 한걸음을 딛을것인지, 아님 반걸음만 디딜것인지. 역사가 말해주듯 정말로 혁신적이었던 친구들은 언제나 화끈하게 망해버린다. 한걸음을 딛는다는 행위가 가져올 대단한 위협은 걸음을 딛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반걸음만 딛기도 한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한걸음을 딛어버린다. 그리곤 화끈하게 망하기도 한다. 참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렇지 않은지?




2003년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