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보네거트 그렇게 간지 어언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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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네거트씨가 세상 뜬 지 1년 하고도 몇 달이 흘렀다. 이 즈음에, 그에 대한 추모의 글 하나를 발견했다. 원문을 찾아 보니 살롱닷컴. 그 내용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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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네거트와 체스를 두다
– 앤드루 레오나드


뉴욕에서 맞은 열두 살의 추수감사절에 나는 커트 보네거트와 체스를 두었다. 지난 10년 동안 맞이한 추수감사절보다도 그날을 더 뚜렷하게 기억한다. 뉴욕의 체인스모커 한 대대가 다시는 누구도 담배를 피우지 않을 듯 한 기세로 피워대는 해로운 연기. 작가 그룹이 술렁이며 웅성웅성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광기 어린 잠자리들처럼, 그러나 아름답고도 불가해하게 내 머리 주변을 날아다녔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마티니잔에 반사되는 빛. 그리고 보네거트, 두 눈이 언제나 슬프게 반짝이는 그의 얼굴은 처량한 친절을 머금고 있었다.


아버지와 보네거트가 친구라서 간간이 두 분의 친분에서 오는 부수 효과가 있었다. 나는 아시모프와 하인라인, 그리고 그보다는 좀 떨어지는 SF 작가들의 작품을 설렵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타이탄의 미녀>를 건네주며 말했다. “하인라인은 파시스트야. 이 책을 읽어라.” 그 추수감사절에 아버지와 보네거트의 친분 덕분에 얻은 또 다른 부수입이 있었다. 보네거트가 탱고처럼 오가는 대화들을 피해 바닥에 내려와 앉더니 나에게 체스를 두자고 했던 것이다.


그는 즉흥적으로 체스판을 재배열하자고 제안했다. 왜 졸병(폰)들이 꼭 앞줄에 서야 하니? 최전방의 도살장에서 이내 씹어 먹힐 희생양들, 높으신 권력자의 힘없는 종들 아닌가. 봉건 영주들을 여우 굴에서 끌어내 혼란의 한복판에 서게 하자! 졸을 뒷줄에 세우고, 기사(나이트)와 주교(비숍), 여왕을 앞줄에 세우자! 아, 그 체스판 위에서 이뤄진 신성모독의 전율이란.


물론 내가 그날의 사냥감이었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 새 라인업에 내재한 광기를 탐험하는 동안, 무심결에 드러난 즉흥적인 창조력이 그가 상징하는 전체의 한 조각이라는 단편적인 이해를 얻었을 뿐이다. 너무도 익숙한 인간의 딜레마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기묘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예술가로서, 작가로서의 그 말이다. 보네거트야말로 멍청한 열두 살짜리 공부벌레의 머리를 즐겁게 휘젓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체스 판을 그런 식으로 흔들어놓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그게 맘에 들었다.


12년을 건너뛰어 1986년으로 가자. 그때는 내 생애 최고의 해가 아니라 실수 연발의 한 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미국식 유년기와 얼추 성인기라 할 만한 시기를 가르는 중요한 경계였다. 나는 따분하고 황량한 기분과 나 자신에 대한 회의에 짓눌린 채 플로리다 주 게인즈빌에 살면서 중국 음식점의 안내원으로, 케이터링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저지른 극도로 어리석은 행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이제 막 집착하기 시작한 대만으로 ‘망명’ 하게 해줄지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면서.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친구가 전화를 걸어 커트 보네거트가 탤러해시(플로리다 주의 주도)에서 연설을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우리 꼭 가야 해!” 라고 강조했다. 나는 좀 망설였다. 이렇게 그와 다시 연결된다는 게 이상해 보였다. 그 사이 10여 년 동안 나는 심지어 내가 보네거트를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동부 지역 곳곳에 흩어졌다. 한때는 뒤죽박죽인 체스판 너머로 그와 마주했는데, 한낱 팬으로서 그를 다시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우울할까? 나는 이미 우울했다. 열두 살 소년인 나와 당시의 나를 비교하는,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기회를 즐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는 나를 설득했고, 또 다른 친구까지 합세해 텔레해시로 향했다.


그날 그가 한 말 중 한 마디라도 기억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웃었으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보네거트는 황량한 염세주의에 자상한 온기를 섞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재주를 지녔다. 심지어 세상이 정말 얼마나 망가졌으며 범죄라 할 정도로 미쳤는지를 강조하는 순간에조차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다.


연설이 끝난 뒤, 친구들은 나를 등 떠밀며 무대로 가서 우리가 그 위대한 인물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기회를 보자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에겐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열두 살 때 부모님의 거실에서 보네거트와 놀았던 비화를 식탁의 화젯거리로 10여 년 동안 우려먹은 터라 수줍어하며 물러날 입장이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갔지만 입구를 지키는 사람이 우리를 막았다. 난처했다. 나는 그녀에게 추수감사절에 체스를 두었던 꼬마가 왔다는 말을 보네거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이 먹힐 거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났다. 슬프게 반짝이는 눈빛은 여전했다. 그에게서는 온기가 넘쳐났다. 다시 차를 몰아 게인즈빌로 돌아가는 두 시간은 찬란하게 빛났다. 그 뜨겁고 습한 플로리다의 여름밤, 보네거트는 내가 기억하는 사람 그대로라는 것을 증명했다.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앞으로 보네거트가 남긴 유산이 평가되고 논쟁거리가 되는 문화전쟁 속에서 교활한 메아리들이 들려오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미<뉴욕타임스>의 부고 기사에는(서둘러 덧붙이지만, 그 기사는 고인에게 마땅한 대우를 했다) 이런 문장이 실렸다. “보네거트를 가장 냉혹하게 평가하는 비평가들은 그를 만화책 철학자, 헛된 격언을 퍼트리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 쓸데없다. 커트 보네거트는 좋은 사람이었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인간’ 이었다. 그가 떠난 우리의 세상은 더 얕아지고 더 황량해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한 편이라도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아니면 그 반짝이는 눈빛의 온기를 쬘 만큼 운 좋았던 사람이라면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 체스 규칙을 비틀어버린 특이한 괴팍스러움과 함께, 그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그가 없는 세상은 이전보다 덜한 곳이 되었지만, 그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은 언제나 더 나은 곳이다.

http://www.salon.com/tech/htww/2007/04/12/vonnegut/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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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네거트씨가 그런 사람이었음을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이것은 <제5도살장>의 서문 부분만 읽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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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그때 젖비린내 나는 애들에 불과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뭐라고요?” 내가 물었다.
“전쟁 때 당신들은 젖비린내 나는 애들에 불과했다고요. 이층에 있는 저 애들처럼!”
나는 인정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는 전쟁 때 이제 막 아동기를 벗어나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이었다.
“그런데도 소설에는 그렇게 안 쓰겠죠?” 이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규탄이었다.
“모–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난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었던 것처럼 쓸 거고, 영화화 되면 프랭크 시내트라나 존 웨인처럼 매력있고 전쟁을 좋아하고 지저분한 배우들이 당신 역을 맡겠죠. 그럼 전쟁이 아주 멋져 보일 거고, 그러면 우리는 훨씬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되겠죠. 그리고 그런 전쟁에서는 이층의 저 애들 같은 어린애들이 싸우겠죠.”
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그토록 화나게 만든 건 전쟁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은 물론 그 누구의 아이들도 전쟁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부분적으로는 책과 영화에 의해 조장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른 손을 들고 그녀에게 맹세했다.
“메리, 내가 쓰고 있는 책이 완성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썼다 없애 버린 원고가 5천 쪽은 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내가 이 책을 완성한다면, 명예를 걸고 당신에게 약속하겠습니다. 그 소설에는 프랭크 시나트라나 존 웨인이 연기할 만한 대목은 하나도 넣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렇게 하지요. 책 제목을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붙이겠어요.”
그때부터 그녀는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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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제로 그 책의 제목이 <Slaughterhouse Five or the Children’s Crusade: A Duty Dance With Death (제5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 죽음과 추는 억지춤)> 이 되었음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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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discotheq.tistory.com


Gould. Goldberd Var. 18

twee!


1. The Orchids의 신보가 나오는 레이블이 Siesta가 아니더군. 여전히 LTM. Sarah 출신
중에선 Heavenly 정도만 Siesta에서 앨범을 내는듯. 어쨌든 LTM. 예쁜짓 많이 한다.
신보도 내주고 LP도 리마스터링해서 재발매 해주고 ㅠ_- 참 고맙긴한데,
EP는 어떻게 안되겠니? -_-;
 
2. 근데 문제는 그 재판된 앨범들이 K가 갔었던 버진메가스토어엔 한장도 없었다는 점 -_-
결국은 아마존과 상의해봐야할지경 아놔. ;

3.  대신 K는 Filed Mice의 데뷔앨범을 사가지고 왔다. 불행중 다행.
집컴퓨터에 있던 그앨범 MP3는 LP녹음한거라 음질이 말이 아니었었다;
고맙네 친구. 시디값은 2017년까지 꼭 줄께! -_-b (원츄)

4.  Sarah 의 최고 간판스타는 The Orchids와 Another Sunny Day인걸로 알고있었는데,
이번일도 그렇고 LastFM에 리퀘스트 숫자도 그렇고 Field Mice쪽이 더 인기있는 모양.

5. 문닫은지 몇년만에 팬사이트도 재개장해. 앨범도 몽땅 재발매되. 정말 생각지도 않은
신보가 나오는데다가, 이번달 2일에는 런던에서 공연까지 했더군. 팬으로서는 정말
기대하지도 않았던 해피한일이 차례로일어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백만리
떨어진 브리티쉬에서의 이야기일뿐.  여기 아시아 한쪽에서 근근히 하루벌어먹고사는
IT일용잡부팬 의 입장에선 가끔 둘러볼수 있는 팬포럼이 생겼다는것이외엔 딱히
실감나는일은 없는.
그래도 신보는 기대되고. 언젠가는 한번 공연도 보고 싶고.

6. 근데 지금 연세에도 과연 이목소리가 나올것인지 -_-a

7. 핸드폰으로 날아오는 광고문자 의 99%까지는 내게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이야기들인데
오늘 날아온 문자하나에 눈길이 고정되었다. 오월 김창완 콘서트.
와우!
다만 ‘하얀거탑 부원장님의 생생한 투잡현장’ 이라는 미사여구는 쫌 뺐음 좋았을텐데 말이지;

8. The Orchids, Another Sunny Day, The Field Mice, Even As We Speak.
Gentle Despite, The Rosehips,Action Painting, St. Christopher, Blueboy.
…기타 등등
Sarah를 스쳐갔던 많은 이름들중 몇명이나 지금 활동을 하고 있을까? 10%? 25%?

어떤이들은 죽었을지도모른다. 그렇다면 그이외엔 살아있을테지. 여전히 이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반면, 끝내는 밴드를 해산하고 다른 직업을 찾아나선 사람들도
있을테고. 혹은 음악자체가 투잡이었거나, 취미였거나 뭐 이런저런 많은 방식의 삶들을
살아남아있는 사람들을 영위해 나가고 있을것이다.
 
그래요. 어쨌든 당신들은 나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Sarah가 업어진지 벌써 10년이 넘고
이십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의 목소리를 사운드를,
투명하고 또 투명했던 해맑은 감성들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들이 살던
저 영국 어딘가에서 수백만리 떨어진 여가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조차.